[단편소설] 유리벽 / 우원규

[단편소설] 유리벽 / 우원규
_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 수상작(2011년)
나는 칼바람이 시퍼렇게 일렁이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삼 개월째 필사적으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길게 한숨지으며 차가운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모습에서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식! 죽어도 꼭 이런 데서 죽지. 지가 무슨 호국 혼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나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 서서 천 년이 넘도록 냉혹한 파도의 손길을 숙명인 양 감내하고 있는 문무왕릉 대왕암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혹시나 남아 있을지도 모를 Y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내가 Y의 이메일을 받은 것은 그 전날 밤이었다. 과대망상증 환자답게, 유대교 카발라의 최고 상위 의지체를 의미하는 아인소프를 인터넷상에서 그의 별명으로 사용했던 Y는, 어젯밤에도 '아인소프의 종말'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제목의 장문의 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이젠 그의 광기 어린 헛소리를 들어주는 일에도 지쳐있었던 나로서는 메일을 바로 삭제해 버리고 싶었지만, 종말이라는 단어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그의 메일을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 누추한 이 땅에서 몸이 부서지도록 발악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동해 바다에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종말은 어차피 예견되어 있던 것이라 내게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너 같은 놈은 벼락 맞아 뒈져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었던 나였다. 무책임한 자식! 저 혼자 편하겠다고 자살을 해? 너 때문에 한 겨울에 거리에 나앉게 된 너네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뼈가 부서져라 일해서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야 할 게 아니냐. 썩을 놈!
나는 버버리 코트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서, 그의 가슴에 맺힌 한이 오돌오돌 떨고 있을 차가운 바다 쪽으로 힘껏 집어던졌다. 시퍼런 지폐들이 모진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을 배회하다가 바다에 떨어져서 성난 파도에 휩쓸려 갔다. 이 놈아,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돈이다. 저승 가는 여비 넉넉히 넣었으니, 이승에서의 일은 다 잊고 잘 가거라. 비록 네 몸은 살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 바다 속에서 울고 있겠지만, 네 혼만은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배불리 먹고 가거라. 뭐? 아무도 못 찾게 등산 가방에 돌멩이를 채워서 몸에다 꽁꽁 묶은 후에 물속에 뛰어 들어? 끝까지 꼴값을 하는구나. 죽을 때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잘 가거라. 꼴도 보기 싫은 자식아!
한참을 바닷가 바위에 서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서 바위에 맹렬히 부딪혀 스스로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거대한 바닷물을 출렁이게 하는 저 힘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재미없는 장난감처럼 우리의 운명을 갖고 놀고 있겠지. 차가운 칼바람이 몸을 쑤시고 지나가는 것 같아 코트 깃을 여미며 얼른 차로 돌아왔다. 시동을 끄지 않은 차 안은 따뜻했다. 히터를 최고로 높여서 바닷바람에 얼어붙은 손을 녹인 후에야 서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의 기억이 가위눌림처럼 내 머릿속을 맴돌아서 머리를 흔들어대야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취미로 시작한 어느 역학 공부 모임이었다. 제갈공명이 전쟁터에서 병법의 일환으로 사용했다는 기문둔갑이라는 역학을 배우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섰을 때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점잖게 자리를 잡고 있는 사이로 20대로 보이는 아주 젊은 남자가 앉아 있어서 내 관심을 끌었다. 요즘은 사주나 관상, 수상, 타로 카드 등의 역학을 배워서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여서 문화 센터뿐만 아니라, 대학교에서도 평생 교육원에서 역학 강의를 할 만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많이 보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래전부터 점쟁이라고 하면 왠지 뭔가 타고난 신기랄까, 하다못해 도사처럼 수염이라도 길게 기르고 있거나, 무당처럼 무서운 얼굴로 무릎이 닿기도 전에 모든 걸 꿰뚫어 보는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여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요즘은 '자기 사주는 자기가 푼다'라는 캐치 프레이즈 아래 취미로 역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20대 젊은이가 그런 공부 모임에 나타나는 일은 흔치는 않기에, 첫날부터 그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는 180센티미터 정도의 훤칠한 키에 체격도 좋고, 얼굴 또한 깎은 듯이 잘 생긴 미남은 아니었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호감형이었다. 다만, 내가 강의 시간에 배운 이론에 의하면, 그는 곱슬머리에 아랫입술이 앞으로 툭 불거져 나온 것이 고집이 상당히 세어 보이는 관상을 갖고 있었다. 강의를 하신 분의 다소 거친 표현대로라면 그는 부모 눈에 흙이 들어가도 말을 안 들을 관상을 갖고 있었다.
지루한 첫 강의가 끝나고 다음 강의가 시작하기 전 잠시 쉬는 사이에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내가 먼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젊은 분이 기문둔갑은 배워서 어디에 쓰려구요?
-아 네. 주식 투자 하는 데 참고하려고 합니다.
-기문둔갑으로 주식 투자도 가능한가요?
-네! <기문둔갑 주식 대박 비법>이라는 책도 있거든요. 제대로만 공부하면 주가의 등락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냥 내 사주가 궁금해서 취미로 배우고 있는데, 이런 거 배워서 주식 투자에 적용한다는 게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데요. 그게 가능하다면 역술인들은 전부 주식의 고수가 되어서 대박을 터트려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이 꾀죄죄한 강의실에서 역학 강의할 일도 없겠죠.
-역술인들 중에 주식 거래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자기 사주를 자기가 잘 아니까 그런 거겠죠. 주식해서 성공할 사주가 따로 있거든요.
-그렇다면 본인은 주식해서 성공할 사주란 말인가요?
-네.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말꼬리를 흐리는 게 어쩐 일인지 그의 대답엔 자신감이 별로 없어 보였다.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어서, 강의가 다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으며 좀 더 대화를 해보기로 하고 커피를 들고 강의실로 돌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건 것부터가 큰 실수였다. 그냥 본 척 만 척 무관심하게 넘어갔었다면 이후에 펼쳐질 삶의 아비규환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알게 된 것은 그는 나와는 띠동갑이었다. 내가 그 당시 40세였으니, 그는 28세쯤 됐던 것 같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중퇴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각종 알바부터, 호텔 보조까지 섭렵했는데, 밤이면 이리저리 뒤엉킨 남녀들이 또 하루분의 욕정을 불태우기 위해 모텔을 드나들었는데, 그는 손님들이 나가자마자 바로 방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뒷정리를 하고 나와서 다음 손님을 들여 보내는 일을 했다고 했다. 복도를 지날 때면 이방 저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귀마개를 하고 일해야 할 정도였다며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막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렇게 고생 해서 벌어봐야 아버지 약값 대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노동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장남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기에 청춘의 낭만 따위는 그에게는 사치에 불과했다면서, 하루에 두 개의 알바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할 때도 있었는데, 아무리 젊은 나이였지만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단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주식이 바로 그 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3년 전부터 어떻게든 주식으로 돈을 벌어보려고 숨어있는 주식의 고수도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지만, 그 사람들이 핵심 비법을 공개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역학을 공부하면 주가의 등락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 전부터 역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서 젊은 사람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주식으로 인생을 바꿔보려는 그의 발상이 마음에 걸렸다. 내 직장 동료 중에도 선물 옵션에 손을 대었다가 1억이나 날린 사람도 있었고, 주식으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으니 주식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 시골국수라는 주식의 고수가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면서 큰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었기에, 젊은 그가 왜 하필 그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 그동안 주식 투자를 연구해서 성과는 좀 있나요?
-네! 역학을 이것저것 배우고 나서 주가 등락을 예측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해졌습니다. 기문둔갑까지 배우면 적중률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어제는 모의 주식 대회가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1등을 했습니다.
-그래요? 잘 되고 있나 봐요? 사실 주식 한다기에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성과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역학을 배운 것이 정말 주가 등락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나 봐요.
-역학도 도움은 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연구해보니까 그 이상의 뭔가가 하나 더 있어야만 주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피시방에서 일하면서 주식과 역학 공부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모니터를 여러 개 사용할 수 있고, 또 화면이 커서 피시방이 주식 연구하기에 참 좋거든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주식에 대한 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머리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한 적이 있을 만큼 타고난 머리는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공부보다는 알바에 더 전념하다 보니, 결국은 대학도 중퇴하고 20대 후반이 되도록 해놓은 것도 별로 없이 주식 대박의 꿈을 꾸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아주 성실해 보였고, 엄청난 학구파여서 늘 역학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취미로 공부하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 사주도 풀어주었는데, 안타까운 듯 혀를 쯧쯧 차면서 사주에 재물이 많지 않으니 그냥 현재 다니고 있는 동사무소에 근속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봐도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매일 민원서류나 발급해주면서 퇴직할 때까지 버티는 것, 그것이 내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뻔한 내 인생에 뭐가 더 궁금한 게 있어서 역학을 배울 생각이 들었을까? 나이 4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지내다 보니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런지 알고 싶었다. 그 당시에 이미 여자 손목을 잡아본 지도 7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왜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것인지, 여자들은 왜 나만 미워하는지 궁금했다. 다리가 좀 짧다는 거, 얼굴이 좀 덜 생겼다는 거, 배가 좀 나왔다는 거를 제외하고는 안정적인 직장에, 또 뭐가 있더라... 젠장, 하여간 왜! 도대체 왜!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일하는 동사무소에도 미혼의 여직원들이 몇 있었지만, 나를 무슨 배불뚝이 아저씨 취급을 하면서 전혀 남자로는 생각하려고 하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점점 독신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내 인생이 한심하기도 하고,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평생 총각으로 살다가 죽어서 몽달 귀신이 될 운명인지 궁금해 하던 중에 마침 가까운 문화센터에서 역학 강의를 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바로 신청해서 듣게 되었다. 강의를 듣다보니 내 사주가 결혼이 늦어지긴 하지만, 다행히 가슴에 한을 품고 구천을 헤매다가 금실 좋은 커플 사이를 이간질할 몽달귀신이 될 팔자는 아니어서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삼겹살에 소주 두 병을 주거니 받거니 나눠 마시고 나니 어느덧 우리는 많이 친해져 있었다. 식당을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걸어 가면서, 그가 곰살맞게도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다음날이 마침 일요일이니 삼각산으로 등산을 같이 가자고 해서 오랜만에 폐에 맑은 공기를 넣어 주려는 요량으로 선뜻 승낙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삼각산은 가보지 못했었다.
다음 날 아침 내 자동차 브레이크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우리는 지하철과 버스, 택시까지 갈아타고서야 겨우 삼각산 아래 도선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 중앙에 높은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부처상을 앉혀 놓아서 '여기부터는 청정 수행 도량인 도선사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왠지 말도 조심스러워지고, 담배를 피우는 등의 너저분한 행동도 삼가해야 될 것 같았다. 애연가들은 잘 알겠지만, 이상하게 산에만 오면 담배가 더 땅긴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담뱃맛이 아주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그래도 청정한 도량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지나가는 스님에게 들키면 타박을 받을 수도 있으니 참아야 했다.
주차장에서 저 멀리 허연 운무가 피어나는 삼각산 정상을 바라보니 신령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삼각산에는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인수봉이라는 봉우리가 뭉툭하게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주위로 허연 운무가 둘러앉아 있으니 영락없이 대머리 벗겨진 동사무소 홍 과장님의 두상을 닮은 것 같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혼자 키득거리고 있는 사이에, Y는 이미 삼각산에는 자주 와본 듯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도선사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일주문에서 공손하게 합장하고 허리 굽혀 정성스레 절을 하는 그는 신실한 불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물어보니 불교를 믿는 건 아니라고 했다. 욕심을 버리고 살라는 무소유의 불교의 가르침은 먹고 살기 위해 밤낮으로 알바를 하고 있는 그에게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로만 들린다고 했다. 그래도 뭔가 모르게 절에 오면 편안함을 느낀다는 그는 밥을 먹는 중에 방귀가 나왔을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에 천착하다가 인간이란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면서 마치 득도한 큰스님처럼 껄껄 웃어댔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괴리! 즉, 인간이 수백만 년을 진화해 왔지만, 아직도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면서, 부처님이 설하신 깨달음에 대한 무상(無上)의 설법도 지하철역사에서 신문지 덮고 얼어붙는 겨울밤을 보내야 하는 노숙자들에게는 핫바지에 방귀 새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그럴듯한 지론을 폈다.
오르막을 계속 오르다 보니 평소에 숨쉬기 운동 외에는 모든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아온 나는 슬슬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자꾸 뒤처지는 나와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그는 주식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벌면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기특한 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려서부터 가장 역할을 하면서 살다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이 생긴다는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20대 젊은이의 얼굴에서는 보기 어려운 성공에 대한 강한 열정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젊은이의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체험을 해야만 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절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계단을 쭉 올라가니 기도 터가 나왔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리를 깔고 연신 절을 해대고 있었다. 도선사 기도 터에는 특이하게 큰 암벽에 새겨진 8미터가 넘는 마애관세음보살상이 있는데 영험하기로 소문이 많이 나 있어서 전국에서 소원 성취를 위해 기도하러 찾아온다고 Y가 나지막한 소리로 알려줬다. 할머니들이 무슨 간절한 소원이 있기에 기다란 염주를 움켜쥔 채 정성을 다해 절을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할머니 나이 정도 되면 삶에 큰 애착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자손들을 위해, 또 당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리라.
나는 살아오면서 하느님에게든 부처님에게든 기도를 하거나 누구에게 뭔가를 빌어본 적이 없었기에 기도 터의 뜨거운 열정이 오히려 어색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열정을 바쳐서 해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아 약간 머쓱해지기도 했다. 크게 욕심도 없고 크게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냥저냥 대학 졸업하고 9급 공무원 시험 쳐서 동사무소에서 온종일 잡무를 처리하다가 집에 오면 티비를 보다가 잠이 들었던 나였다. 딱히 취미도 특기도 없이 걸림없이 살아온 내 모습이 흡사 절간의 스님네들의 무욕의 마음과 닮지 않았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내 입가엔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Y는 방석이 잔뜩 쌓여 있는 구석에 가서 방석을 두 개 가져와서 자리에 깔았다. 기도 터에 온 김에 108배라도 하고 가자는 말에 나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얼른 절할 준비를 했다. 합장을 한 채 생각했다. 근데 무슨 소원을 빌지? 그 당시 나의 유일한 소원은 노총각 신세를 면하는 것이었다. 목표가 정해지고 내가 서툰 자세로 절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 사이에 옆에 있던 Y가 초고속으로 절을 해대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렸다 금방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모양새가 마치 절하는 기계 같았다. 여름철에 너무 무리하면 탈 나는데...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덧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입으로는 계속 나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서 절을 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 말씀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폄하하면서 염불은 뭐고, 절은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우여곡절 끝에 108배를 다 마치고 그를 돌아 보니 여전히 땀을 뻘뻘 흘려가며 무아지경에 빠져서 그가 절을 하는 것인지, 절이 염불을 하는 건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옆에 내가 있다는 것과 산에 오르기로 한 것조차도 모두 다 잊어버린 듯 했다.
할 수 없이 방석에 주저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서 기도하는 젊은 여성을 지켜보다가 문득, 어쩌면 저 여자도 이미 혼기를 놓쳐버려서 애타는 마음으로 좋은 신랑감이 나타나길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 Y가 드디어 한숨을 쉬더니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아무래도 등산은 형님 혼자 해야겠다는 황당한 말을 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혼자 무슨 재미로 등산을 한담. 여기까지 와서 산에도 안 가보고 그냥 갈 수도 없고, 기도하는 건 더 재미가 없고...기도발이 잘 받아서 계속 절을 하고 싶다는 그를 남겨두고 혼자서 털레털레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가서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등산로를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삼각산은 참 이상한 게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마치 조금 전에 이슬비라도 내린 듯이 산길의 낙엽도 젖어 있고, 우거진 숲에 물기가 참 많이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언젠가 관악산에 올랐을 때 느낀 그 먼지가 펄펄 날리는 건조함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관악산은 원래 풍수적으로 불기운이 왕해서 산이 조열(燥熱)하다는 걸 역학 강의 시간에 들었다. 그나저나 혼자 무슨 재미로 등산을 한담. 나는 홍 과장님의 두상을 닮은 인수봉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아무래도 의지를 내기가 어려워서 조금 걸어 올라가다가 산 중턱의 인적이 없고 조용한 곳에 퍼질러 앉아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등산로 입구에 산불 조심, 흡연 시 벌금 30만원이라는 경고문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던 게 생각났지만,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힘차게 빨아들이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담배 연기가 습한 산공기에 잡혀서 운무처럼 몸주변을 감쌌다가 서서히 흩어졌다.
동사무소에서는 이제 담배 피우기가 점점 눈치가 많이 보인다. 공공기관에서는 금연 바람이 불어서 애연가들은 설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수반하게 된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 갑씩 피워댔지만, 그 당시엔 반 갑 정도로 줄인 상태였다. 흡연자들을 거의 폐암을 퍼트리는 살인자로 몰아가는 세상 분위기 때문에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끊어야 할 담배인지라 조금씩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산에서 피우는 담배는 정말 꿀맛이었다. 군 시절 고된 훈련 중에 10분간 휴식! 담배 일발 장전! 이 구호가 나오면 너도나도 군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가슴 깊숙한 곳까지 하얀 희열을 빨아들이곤 했다. 마치 종교처럼 뼛속 깊숙이 스며들어서 영혼의 시름을 모두 잊게 하는 그 맛. 하지만 이젠 그런 맛있는 추억도 아련한 구시대의 생활상으로 전락하여 가는 세태가 아쉬울 뿐이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서 마개를 땄다. 산에 오르기 직전에 주차장 매점에서 사서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아직 시원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티비에서 본 여자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려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오로지 물만 먹고 살고 있다는 여자가 나왔다. 바싹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까웠다. 물 이외에는 먹으면 바로 토해버린단다. 게다가 근육 무력증이 와서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TV 속의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뭐랄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웃음 속에 커다란 슬픔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 한참 동안 그녀의 웃음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나라면 웃을 수 있을까. 하기야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는 무지막지한 운명 앞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웃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고 해도, 나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왜 사냐면, 웃지요. 그래 그게 정답이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인생에 더 나은 정답은 없다. 웃고 사는 거다. 까짓거 결혼을 못하면 또 어때. 화려한 싱글로 멋지게 살다 가면 되는 거지. '멋지게'라는 단어는 나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앉아 있는 숲 그늘 주변에는 마치 향로에서 제 몸을 사르고 있는 향처럼 맥문동이 무리지어 보랏빛 향기를 사르고 있었다. 한적한 숲 속에 앉아서 담배 서너 대를 피우면서 구슬픈 산새들의 노래를 감상하다 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슬슬 내려 가볼까. 올라갈 때는 숨이 차고 힘들어서 가다 서기를 반복했는데, 내려올 때는 중력에 몸을 맡기고 후다닥 산에서 내려와서 도선사 기도 터에 다시 올라 가보니, Y는 여전히 절을 하고 있었다. 간절하게 두 손을 합장하고 부처님 앞에 오체투지로 절을 해대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장난스럽게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 언제 가냐, 집에 언제 가냐, 집에 언제 가냐...똑! 똑! 똑! 똑!... 입속에서 혀를 튕겨 목탁 소리를 내었더니, 절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가 곁눈질로 힐끔 장난기 어린 내 얼굴을 훔쳐보고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때문에 더는 못하겠네요. 약수터에 가서 물이나 마시고 내려 가시죠.
조금 걸어 내려가니 약수터가 나왔는데, 그는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퍼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쭉 빼더니 자기 머리에 뒤집어썼다. 아! 시원하다. 휴, 이제 살 것 같네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니 그의 얼굴이 더 훤해 보였다.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면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는 3천 배를 벌써 9번을 했다고 했다. 쉬지 않고 절을 하면 3천 배 하는데 8시간 정도 걸리는데, 한 번만 더 하면 3만 배를 채우게 된다면서 그때쯤이면 그의 소원도 이루어질 거라고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부처를 자기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처님이 3만 배의 절을 공짜로 받아먹기가 미안해서 그 대가로 주식 대박이라는 그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라면, 나는 결혼하게 해 달라고 10만 배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광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내가 뭐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등산은 같이 못 올 것 같았다.
이유는 달랐지만 둘 다 많이 지쳐서 내려가는 발걸음이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워졌다. 도선사 주차장으로 두리번거리며 터벅터벅 내려가는 중에 Y가 핫팬츠를 입고 올라오고 있는 글래머 아가씨를 가리키며 자기가 좋아하는 레이싱 모델을 닮았다면서 연신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감격스러워했다.
-저거 다 뜯어고친 거야.
-형님도 참. 그러니까 형님이 아직 결혼을 못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항상 얘기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라는 겁니다.
-수술을 해서라도 이쁘기만 하면 된다? 그럼 과정은?
-과정이야...결과가 말해주는 거 아닙니까. 저 착한 몸매를 보십시오. 마음씨도 너무 착해 보이지 않습니까? 캬... 좋다.
그와 대화를 할수록 나이에 비해 지극히 현실적인 그의 가치관에 약간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나도 그다지 순수한 편은 아니니까.
1주일 후 역학 강의실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그는 아주 신이나서 들뜬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드디어 숨어있는 주식의 고수를 만나게 되어서 비밀 투자팀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게 다 3만 배를 정성껏 채운 보답이라고 했다. 3만 배를 끝낸 바로 다음날 닥터 K라는 주식 고수를 만나게 되었다면서 나보고도 노총각 신세 면하려면 3만 배를 해보라고 권했다. 3만 배를 하느니 몽달귀신이 되는 길을 택하겠다고 했더니, 살아서 결혼은 못 하더라도 죽어서 영혼결혼식이라도 하려면 3천 배라도 해서 공덕을 쌓아 두라는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몽달귀신으로 혼자 떠돌아 다니면 외로우니 처녀 귀신을 만날 수 있도록 살아 있을 때 부처님 전에 공덕을 쌓아 두라는 것인데, 그의 기도의 효험에 대한 믿음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나저나 선물옵션이라는 걸 하려면 보증금이 1500만 원이 있어야 하고, 또 투자금도 있어야 해서 부모님을 졸라서 집문서를 잡히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모양이었다. 고수를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오랫동안 고대하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돈 벌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 부모님도 제정신인지 무슨 집 문서를 그렇게 쉽게 내준단 말인가! 내 눈에는 전부 미친 짓으로 보였지만, 내가 옆에서 뭐라고 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상황이어서 대박 나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고 말았다. 돈 많이 벌면 한턱 쏘라고 했더니 좋아 죽겠다는 듯이 웃어댔다.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다. 그 점에서는 그가 아무런 목표도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없는 나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것이 거짓 희망일지라도, 희망을 갖고 사는 동안은 행복할 테니. 그래서 나도 마흔한 살이 되기 전에 장가가기라는 목표를 설정해 보았다.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지만, 왠지 마음이 한결 즐거워졌다. 강의 듣는 내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다음 주부터 그는 역학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주식 기밀 정보가 빠져나가면 안 되기에 비밀 투자팀 내에서 휴대폰 사용을 금지했다면서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것 같다는 말만 남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4개월이 지나고 역학 강의가 끝나는 날 소란스런 쫑파티가 한창일 때 받은 전화에서 울려나온 낯선 목소리의 여성을 통해서였다. 다짜고짜 Y를 아느냐고 해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여동생인데 최근에 Y를 만난 적이 있는지 묻길래 연락 안 된 지가 꽤 됐다고 했더니 실망스러운 듯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실례가 많았다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걸 붙잡고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를 통해 들은 얘기로는, 이미 가족이 살던 집은 대출받은 은행에 넘어가서 작은 집으로 월세를 얻어서 나간 상태였고,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고 욕을 해대는 통에 가족들이 전부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가족들 몰래 사채까지 끌어다 쓴 모양이었다. 주식으로 패가망신 한다더니 바로 Y의 집이 그런 경우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2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고, 그 때는 집에서 모든 빚을 갚아 주었지만, 이번엔 갚아줄 돈도 없어서 가족들도 배 째라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었고, 연락이 안 되는 Y를 실종 신고하고 나중엔 아예 호적에서 파내버리겠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벌써 사고를 한번 친 Y에게 또 집문서를 내어준 부모님은 뭐란 말인가! 동생 말로는 Y가 워낙 자신 있게 얘기해서 이번엔 정말로 주식으로 대박을 쳐서 지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Y의 책상에 내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고 했다. 그녀와 전화를 끊고 나서 식당으로 돌아가서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나서야 지난 일들이 마치 퍼즐 맞추어지듯이 모든 게 명확해지는 걸 느꼈다. Y가 보여주었던 돈에 대한 그 병적인 집착이 왜 생겼는지, 내가 뭘 물어보면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대충 얼버무리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미친 자식! 갑자기 삼각산 도선사에서 무아지경에 빠져서 절을 해대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한기가 돌아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들이키고 나니 술기운이 돌아서 대충 인사를 하고는 식당을 나와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고정된 형체도 중심도 없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로 보였다. 갑자기 세상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길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잠시 후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빙빙 돌고 차 경적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그 혼돈 속에서도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면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던 Y의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라. 제발!
차 경적 소리에 놀라 내가 눈을 떴을 때는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길가 벤치에 누워 한 시간 이상 잔 것 같았다. 길거리에는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밤길을 배회하고 있었고, 술집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야한 색조로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막차라도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지하철역 근처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정신을 차려서 허겁지겁 뛰어내려 가니 마침 저 멀리서 마치 뱀이 굴속으로 기어들어가듯이 전철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전철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Y에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면 전화가 해지되어서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지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집안은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는 저 혼자 어디서 편안하게 숨어 있는 거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너 때문에 집안이 초토화되었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 빨리 연락 바란다.
다음 날 아침 메일함을 확인해 보니 그의 답장이 와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경주로 거처를 옮겨서 아직도 주식 대박 비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닥터 K라는 주식 고수가 이끌던 비밀 투자팀은 큰손들의 계좌 추적으로 와해되었고, 그 후 혼자 경주로 내려가서 선덕여왕릉에서 밤마다 자시 기도를 21일간 정성껏 올리면서 주식 대박 비법을 알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단다. 그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온 영혼을 다바쳐서 기도를 했단다. 그랬더니 21일이 지나고 주식 챠트를 보니 그동안 아무리 연구해도 풀리지 않던 매듭이 풀려서 이제는 정말로 주가의 등락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면서 흥분에 겨워서 답장을 보내왔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도 있지만, 광즉광(狂卽狂)이라는 말도 있다. 미치면 그야말로 미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서 광증에 빠져서 자아를 잃어 버린 상태였다. 3만 배도 모자라서 선덕여왕릉에서 자시 기도는 또 뭐란 말인가! 주식에 대한 그의 집착이 이제는 그의 영혼까지 완전히 잠식해 버려서 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의 답장을 읽고 나니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고생하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주식 대박만 생각하고 여기저기 기도하러 다니는 그를 생각하니 좀 더 강력한 처방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엔 거친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 야 이 미친놈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네 가족들은 너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아직도 주식이냐?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정신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라! 메일을 쓰면서도 이런 말들이 그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욕설을 떠들어댔다. 그 이후로는 더는 그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마지막 메일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지난 뒤였다. '아인소프의 종말'이라는 메일을 받고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쓴웃음만 나왔다. 광증의 결말은 예상대로 죽음이었다.
한 젊은 생명이 처절하게 죽어간 겨울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서울로 다시 차를 몰아서 올라오면서 나는 최근에 인터넷 검색 중에 우연히 읽게 되었던 시를 생각해냈다. '유리벽'이라는 시였는데, 평소에 시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 나였지만, 그날은 유리벽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무의식중에 클릭해 들어가서 읽게 되었는데, 짧은 시였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기에 복사해서 블로그에 올려두었다. 나보다는 Y가 읽었더라면 훨씬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 시는 마치 그의 운명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노을이 지는 창밖에 싸늘한 시체 한 구를 그려놓고 있었다.
유리벽
투명한 유리창에 연신 머리를 부딪치는
말벌 한 마리를 보고 있다
실연의 아픔을 자학으로 잊으려는 듯
유리창이 부서지도록 몸을 내던지고 있다
말벌은 눈이 먼 듯
드넓은 자유의 공간은 외면한 채
조그만 유리창에 계속 헛발질을 해대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갈 길은 이미 정해졌어
이러다 쓰러져도 후회는 없어
눈앞에 향기로운 들꽃들이 내게 손짓하고 있잖아
저기 바로 눈앞에서
창 너머 서쪽 하늘엔 무심한 노을이 지고 있다
내일 아침엔
눈이 먼 시체 한 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끝>

우원규 시인
본명: 우용수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시노래 시와 작곡 5건, 노래 작사 2건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명상하며 시 쓰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