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 화승(畵僧) / 우원규

우원규 2025. 5. 22. 10:50

우원규 作

 
화승(畵僧) / 우원규
 
내가 경기도 분당에 살 때였으니, 대략 20년쯤 전에 만났던 한 스님과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분당의 율동공원 옆에 있는 나지막한 산에 00사라는 절이 있는데, 지인의 소개로 그 절의 주지 스님과 친분이 생겨서 가끔 만나서 곡차도 한잔 하면서 도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분당 시내의 어느 카페에서 있었던 조촐한 차 모임에서였다. 키가 작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모습의 스님이었고, 얼굴 혈색이 대춧빛처럼 불그스레한 게 아주 건강해 보이셨는데, 나중에 스님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은 스님이 젊은 시절 어떤 도인을 만나서 배운 기공을 매일 실천하고 계시는데 그게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차를 마시며 서로 통성명하는 정도로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한두 달 후 어느 늦은 가을 해질녘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스님의 전화를 받고 찾아간 율동공원 저수지에는 무리지어 서 있는 갈대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오리들이 한갓지게 노니는 물 위로 검은 산 너머로 지는 석양이 곱게 내려앉고, 낡은 나룻배 한 척이 쓸쓸한 갈바람을 맞으며 물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저수지 건너편에 멀대처럼 높이 솟아 있는 번지점프대를 올려다보다가 정신이 아득해져 서둘러 공원을 벗어나 00사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전통 찻집이 보이고 그 뒤로 작은 절이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다.
 
요사채에서 만난 스님은 알고 보니 50대 중반의 그림 그리는 화승(畵僧)이셨는데, 성품이 호탕하고 격의 없이 사람을 대하셔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분이셨다. 대도사에서 운영하는 전통 찻집에는 스님이 화선지에 그린 재미난 그림들이 벽마다 걸려 있어서 명실공히 화승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스님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인이면서, 또한 예술적인 자유혼을 타고난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종교적인 계율만을 강조하는 깐깐한 스님은 아니셨고, 오히려 다른 종교인들과도 교유하고, 속인들을 만나면 곡차도 함께 나눌 줄 아는 규율을 초월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젊은 시절 수행하셨던 이야기기를 듣다 보면, 스님이 성(聖)과 속(俗)을 넘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경지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나 같은 젊은이와도 격의 없이 곡차를 마시며 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소탈한 분이셨다.
 
저녁 공양을 가볍게 마친 후 스님이 능숙한 솜씨로 우려낸 녹차를 마시며 스님이 들려주시는 수행 이야기에 연신 감탄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자, 스님이 미리 준비해 두셨다는 곡차를 꺼내 오셨다. 스님과 곡차. 어떻게 생각하면 전혀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사시는 스님의 성품을 생각하니 이해를 못 할 것도 없었다. 곡차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주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허물없는 친구로 만들어주는 묘약이다. 그날 우리는 밤늦도록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헤어질 때는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두 손을 붙잡고 못내 아쉬워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00사에서 스님을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저녁 무렵에 지난번에 스님을 뵈었던 분당 시내의 카페에서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그날 무슨 행사에 다녀오셨는지 꽤 고양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이 좋아하시는 곡차를 시켜놓고 탁자에 마주앉았다. 스님은 젊었을 때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스님께 그림을 배웠다고 하시면서, 세간에 많이 알려진 중광스님의 기인 같은 행동 중에는 사실과는 달리 왜곡된 부분이 있다며 바로잡아 주셨다. 스님의 스승이 중광스님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스님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이 어디서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달이 발생했다. 스님과 곡차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술에 많이 약했던 내가 취기가 돌면서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스님, 스님이 진정으로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사시는 분이면 굳이 스님이라는 신분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도들에게 스님, 스님 소리 들으며 떠받들려 사시는 그 허울 또한 벗어 던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술주정을 빙자한 내 취중진담을 들은 스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지만, 곧바로 호탕하게 껄껄 웃으시면서 재치있게 맞받아치셨다.
"그래, 중이 승복 벗어 던지고 뭘 할 수 있을까? 어디 좋은 일 있으면 소개 좀 해주게."
스님의 호방한 성품으로 민망한 순간을 잘 넘기긴 했지만, 너무 격의 없이 대화를 하다 보니 벌어진 웃지 못할 사태였다. 평소에 권위적인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반골 기질이 강한 내 성품이 하필 취중에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스님에게서는 그런 권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던 것인데, 비록 취중이긴 하나 스님에게 스님이라는 권위조차 내려놓으라고 객기를 부린 것은 무슨 선문답이었다면 또 모를까 한참 어린 내가 사석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에서 한번 나간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스님이 대범하게 웃고 넘긴 일을 내가 정색하고 사과하는 것도 오히려 스님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도 따라서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그득했다.
 
스님과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참을 더 얘기했지만, 스님의 표정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셨고, 나도 스님을 배웅하기 위해 택시 정류장으로 따라 내려갔다.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몇 마디 나눈 후 스님이 택시에 올라타시는 뒤꽁무니에다 대고 합장하고 꾸벅 절을 했다. 죄송한 마음에 진심을 담아서 합장한 후 절을 했지만, 그것이 스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스님은 취중에 나온 내 실언에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평소의 호탕하던 성품과는 달리 더는 나를 찾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께 승복을 벗어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오시라고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 이듬해인가 친구와 함께 00사의 전통 찻집에서 차를 마실 일이 있어서 찻집에서 일하시는 보살 아줌마에게 스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얼마 전 다른 절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 전통 찻집에는 스님이 그린 그림들이 여전히 걸려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호탕한 스님의 웃음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일 년도 채 안 되어 나도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서, 스님과의 짧은 만남은 늦가을 낙엽처럼 쓸쓸한 추억으로 내 가슴에 남게 되었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율동공원 사진을 보게 되면 00사에 계시던 그 스님의 불그스레한 대춧빛 얼굴이 떠오른다. 스님이 어디에 계시든 부단히 수행 정진하셔서 꼭 성불하시길 빌어 마지않는다.
(끝)
 
* 오늘 처음 발표하는 수필이다.


우원규 시인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명상을 하며 시 쓰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