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사랑, 그 쓸쓸함에 관하여 / 우원규

우원규 2025. 3. 11. 21:18

 

사진_우원규

사랑, 그 쓸쓸함에 관하여 / 우원규
(2013년 선選수필 신인상 수상작)

오후에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서 우산을 받쳐 들고 집 근처에 있는 00사에 산책하러 갔다. 널따란 처마가 비를 막아 주어서 산책하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 오는 날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혼자서 산기슭의 고즈넉함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청량한 00산 산바람은 내 온몸을 시원하게 어루만지고, 비에 씻긴 풀내음은 참으로 싱그럽다. 이름 모를 새들은 어여쁜 목소리로 제각기 노래 솜씨를 뽐내고, 왕거미는 강한 바람에 망가진 집을 수리하느라 바쁘다. 가느다란 거미줄에는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있다.
 
황금 향로에 향 하나 올리니 두 줄기 하얀 춤사위가 멋스럽게 피어난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며 서로 어르는 교태가 원앙처럼 정답기만 하다. 뜨겁게 불사르고 화려하게 흩어지는 연기 같은 인생엔 후회는 없다. 목련 나무 그늘에 촘촘히 서 있는 맥문동은 보라빛 향기를 온몸으로 사르고 있다.
 
잠시 쉬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다가 잔디 사이에서 낡고 투명한 비닐에 들어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난간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작은 비닐로 된 지퍼백 안에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땅에 묻혀 있다가 최근 폭우가 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 비닐의 보존 상태로 봐서는 몇 년은 되어 보였다. 반지에도 아주 가는 흠이 많이 보이는 걸 봐서는 꽤 오랫동안 착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무슨 오래된 유물이라도 발견한 양,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백금으로 만든 반지 중앙에 작고 붉은 보석이 두 개 박혀 있고, 안쪽에 KC ♡ JS 라고 쓰여 있으며 한글로 '커플'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최초에 이 반지는 커플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연인이랑 헤어진 어떤 여인이 00사에 와서 아름다웠던 추억과 함께 잔디밭에 묻은 것이리라. 대개 남자는 이별 후에 이런 감성적인 행동을 잘 하지 않기에 반지의 주인이 여인일 거라고 가정해 본다.

00사에는 볕 좋고 화사한 봄날이나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날 오후에 연인들이 찾아와서,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아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아마 반지의 주인공도 그러했을 것이다. 연인과 함께 옆구리를 맞대고 앉아서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행복하게 웃었던 바로 그 난간에 홀로 앉아 그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추억과 함께 반지를 땅에 묻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단순히 연인이었는지, 부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부부였다면 그 아리는 슬픔이 더 컸을 것이다.
 
두 개의 이름 이니셜 사이에 텅 빈 하트 하나 빗속에서 울고 있다. 뾰족한 우산 끝으로 땅을 조금 파고 그들의 찢긴 사랑을 다시 매장한 후, 그 위에 주변을 굴러다니는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워다 얹어서 빗물에 유실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마치 천주교 신자들이 성호를 긋듯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써서 나름의 기도를 해주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00사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정하게 팔짱을 낀 청춘 남녀가 경솔하게 속삭이며 계단을 올라온다. 그들은 내가 방금 어떤 찢어진 사랑의 추억을 땅에 묻고 내려오는 길임을 모르고 있을 테다. 그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났을 때, 그들의 웃음소리에서 달콤한 라일락 향기가 번져 나왔다.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다.
 
무릇 모든 사랑의 시작은 이렇듯 꿀처럼 달기만 하다. 영원한 사랑은 모든 드라마와 영화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은 존재들이다. 그 사랑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사랑의 기쁨에 빠져서 일생을 다 써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다. 사랑 호르몬의 작용은 대개 3년을 전후해서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참 야속할 지경이다. 왜 인간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인간의 행복에 샘이 나서일까? 참으로 그 속마음은 깊은 물 속처럼 검어서 인간의 시력으로는 좀체 들여다볼 수가 없다.

어떤 철학자는 "사랑은 아름다운 환상이다." 라는 말로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을 규정했다. 아름다움과 환상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환상이라는 말 속에는 영원하지 않아서 무상(無常)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아침의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과 같이 덧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중천에 해가 떠오르면 곧 스러지고 말 영롱함이여! 허무한 사랑의 기쁨이여! 시들어 얼굴이 문드러진 아네모네는 과연 부활이 가능할 것인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속 시원한 해답은 없다. 3년마다 상대를 바꾸어 가면서 사랑의 달콤함을 늘 신선하게 유지하는 카사노바적인 발상도 해보았지만, 한 번 헤어질 때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마음의 번민 때문에 바람둥이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파서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3년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든, 정(情)이나 의리로 사랑을 유지하건, 인격으로 보듬고 살든, 아니면 이도 저도 속 시끄러워서 성(性)을 초월한 금욕수행자가 되어 독신주의를 표방하든, 그건 순전히 각자가 결정할 문제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하건, 사랑의 속성은 항상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신의 시샘을 받은 인간의 사랑은 이렇듯 하릴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오늘 밤에도 연인들은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사랑의 노래를 자귀나무 아래에서 속삭이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겠지. 풀숲에서는 개구리의 사랑의 세레나데가 밤 공기를 울린다.

지난 봄 두 손을 꼭 잡고 벚꽃길을 거닐던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해질녘 서쪽 하늘의 금빛 노을처럼 참 고왔다.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흔해서 경박스럽고, 그냥 "참 보기에 좋았다."는 여백이 있는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그 노부부처럼 누가 봐도 참 보기 좋은 고운 사랑을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심지어 평생 사랑이 깊었던 미국의 80대 노부부는 같은 날 낡은 옷을 벗고 손을 꼭 잡은 채 하늘로 함께 귀천했다고 하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연을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을 둘러보면 그리 흔치는 않은 것 같고, 황혼 이혼에 고독사(孤獨死)가 늘고 있는 추세를 생각하니 마음이 또다시 착잡해진다. 사랑, 그것은 누구에게나 평생의 화두임이 틀림없다.     
<끝>



우원규 시인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명상을 하며 시 쓰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