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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신화로 본 연극론 / 우원규

사진_우원규

신화로 본 연극론 / 우원규
 
인생은 연극이다. 지구라는 무대 위에 80억의 배우들이 완성된 대본도 없이 즉흥 연기를 펼치고 있다. 해와 달, 별은 멋진 조명이 된다. 완성된 대본이 없으니 극작가도 따로 없다. 다만, 신이라 불리는 연출자가 있어서 극작가 역할을 병행하며 연극의 커다란 얼개만 만들어 줄 뿐이다.

신은 배우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그들의 연기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망하는 존재다. 단지, 연극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옴~"이라는 성스러운 소리를 낼 뿐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 연극에서는 배우가 곧 관객이라는 다소 엉뚱한 설정이 존재하는데, 배우가 연기하면서 자신의 연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조금 어색한 느낌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 익숙해지므로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연출자인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나라와 민족마다 각기 고유한 색채를 입힌 신화의 형태로 신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 신화 속에서 배우들은 신의 속성을 지닌 신의 자식들로 자주 언급된다. 신의 자식들이 지구라는 행성에 내려와 동물의 탈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의 자식들은 이 연극을 통해 더 많은 경험을 쌓아서 결국 우주의 별들을 다스리는 성숙한 신으로 성장한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하나의 배역은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몇 개의 배역이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이 법칙은 모든 배우들에게 적용되는데, 선배 배우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수받아서 더 나은 연기를 펼치기 위한 연출자의 안배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볼품없는 인생도 결국 죽어서 하나의 배역을 남기고 다음 시대의 후배 배우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것이니 어찌 허망하다 하겠는가. 이 배역을 어떤 신화에서는 전생(前生)이라고 명명했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타인의 삶이 사후에 하나의 배역이 되는 것이니, 어찌 한 개인의 전생으로 제약할 수 있겠는가.
 
연극을 위해서 연출자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배역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배역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배역은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연극의 소품처럼 공용으로써 필요할 때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다. 다만 배역을 가져다 쓸 때는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을 카르마 즉, 업(業)이라 부른다.

한 배우의 배역은 그가 가져다 쓴 배역의 종류에 따라 어느 정도 결정되어 버린다. 이전 시대의 전쟁 영웅 배역을 가져다 쓴다면 아무래도 이번에도 그 비슷한 배역을 맡는 것이 전체 연극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타고난 속성이 그 연극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구 위의 배우들은 근본적으로는 신의 자식으로서 전지전능한 신의 속성을 타고났지만, 지구에 내려와서 동물의 탈을 쓰고 연기를 하게 되면서 동물의 유산인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감정, 즉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물려받게 되었다.

이 오욕칠정으로 인해서 인간 세상에 아기자기하면서도 스펙타클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참으로 그 무대 규모나 방대한 대본의 양을 생각하면 한 편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각 배우의 배역은 가져다 쓴 이전 시대의 배역들의 구성 요소로 인해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본 전체가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연극의 큰 스토리는 정해져 있으나 소소한 부분들은 배우들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선택해서 연기하도록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굳이 수치로 얘기하자면 최대 40% 정도의 자유 재량권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신화에서 말하는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말들은 스토리 전체의 흐름을 규정하는 것으로 한정해서 사용해야 한다.

배우의 전체 대본은 결코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운명 결정론은 일부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이론이다.

배우들은 근본적으로 전지전능한 신의 자식이라는 속성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수틀리면 연극 전체를 뒤집어엎을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연출자인 신이 잘 알고 있기에 배우들이 미리 꽉 짜인 대본에 숨이 막히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자유 재량권을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즘에서 위대한 한 부류의 영웅 집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해탈자, 혹은 붓다(Buddha), 대사(大師, master)로 불리며 인간의 동물적인 유산인 오욕칠정을 초월하여 신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들로서, 이 닳고 닳은 지루한 연극을 졸업한 위인들이다. 더는 뻔한 연극 스토리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진정한 거인들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 대업을 이루어낸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사후에 종교가 만들어졌고, 그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기 위한 신념 체계가 정립되었다.

그들은 주로 한적한 장소에서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육체를 넘어선 참나의 경지, 신 의식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렇게 연극을 끝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연극을 끝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사실 전 세계에서 전승되고 있는 신화를 연구해 보면 대부분 미래의 일을 예언한 <예언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통해 연극이 끝나는 날에 관한 환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한번 시작한 연극은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상식에 부합하는 이런 예언들은 흔히 종말론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부질없는 공포심을 유발하곤 하지만, 연극의 끝이 곧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연극의 시작을 선포하는 축하해야 할 이벤트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실적으로도 21세기에 들어와서 배우들은 수만 년 혹은 수십 만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이 닳고 닳은 뻔한 연극에 싫증을 내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이 연극은 끝날 때가 되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배우들이 늘고 있다.

뻔한 스토리에 뻔한 연기까지 지겨워서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불평이 무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감동은 차치하고 재미도 없다는 정말이지 최악의 연극 대본과 연출에 배우들의 실망이 폭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이 예언서의 예언이 적중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더는 이런 시시한 연극에 만족할 배우는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세계 곳곳에서 아주 은밀히 혁명이 기획되고 있다고 한다. 신도 이런 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뭔가 새로운 기획의 연극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극판 자체의 존립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해진다.

신은 과연 이 후진 연극을 끝내고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성한 옴을 울릴 것인지 사뭇 기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 자체의 가치가 경감되는 일은 없어서, 연극이 끝나는 날 배우들은 분장을 모두 지우고 왕도 없고 거지도 없는 성숙한 신의 자식들로서 화려한 박사모를 쓰고 만족스러운 듯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동안의 값진 노고를 위로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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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규 시인
본명: 우용수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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