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에 관한 소고 / 우원규
인간의 복잡다단한 존재 양상과 다양한 문화를 들여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묘함에 관해 깊이 묵상하게 된다. 동물과 신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층차의 의식(意識)들이 만들어내는 천태만상의 요지경이 바로 지구에서의 삶이다.
내가 항상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사람은 뭘 믿고 살든 밥만 먹어주면 잘 산다는 사실이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든 절에 다니든, 아니면 어떤 희한한 종교단체처럼 진돗개를 신으로 받들고 살든, 천동설과 지구편평설을 믿든, 돈과 권력을 신으로 숭배하든 아무런 상관없이 잘 산다. 그게 내게는 항상 신기하다. 어쩌면 우리는 공간적으로는 같은 지구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심지어 인도에는 고행을 통해 카르마를 소멸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마치 벌을 서듯 24시간 내내 왼 팔을 든 채로 생활하는 요가수행자들도 있다. 제멋대로 마구 자라서 포도나무 덩굴처럼 휘감긴 손톱과 앙상하게 바짝 야윈 팔은 요가수행자의 깊은 신심과 강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뜨악한 기분이 들 뿐이다.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싱겁게 웃어도 좋고,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해도 좋고, 자아실현을 위해서, 혹은 깨달음과 해탈을 위해서, 또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해도 좋다. 뭐라고 대답하든 열심히만 산다면 잘 살게 되어 있는 게 참 신기한 우리네 인생이다.
이렇게 인간의 삶에서 보이는 기묘한 양상 중 하나로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람의 얼굴을 관찰해서 운명을 읽어내는 관상이라는 술법이 유행했다. 사람의 운명이 얼굴에 드러나는 현상은 참으로 신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관상은 통계학이고, 심지어 농을 반쯤 섞어 "관상은 과학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관상과 권력이라는 소재가 영화로 제작되어 히트 치면서 서점의 매대에 관상 서적이 즐비했던 시절도 있었다.
얼굴에 왜, 어떻게 그 사람의 운명이 나타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은 것일까? 의문은 끝이 없다. 우주의 다른 천체에 외계인들이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운명도 얼굴에 드러날까? 영화에서 본 재미나게 생긴 외계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그건 아닐 것 같다.
"얼굴은 얼이 깃드는 굴"이라고 얼굴의 어원을 밝히는 사람도 있다. 얼굴에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 상태나 기분, 마음속에 품은 생각까지도 읽어낸다. 얼굴에는 약 80여 개의 근육이 있어서 아주 섬세한 감정까지도 표현해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관상에서는 얼굴에 그 사람의 운명과 건강 상태까지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내가 취미로 공부해 본 관상 이론이 얼마나 적중할지 생활 속에서 검증해보곤 하는데,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적중률을 보여준다.
관상에서는 눈을 제일 중요시한다. 관상가들은 다른 곳이 아무리 잘 생겨도 눈이 맑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므로 눈이 맑고 선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그 심성 또한 맑고 착한 것이다. 범죄자나 사기꾼의 눈을 보면 눈빛이 탁하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관상에서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잘 맞는 얼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인간의 심성과 부귀영화가 모두 얼굴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또, 얼굴에는 건강 상태가 드러난다. "관형찰색(觀形察色)"이라고 해서 한의사들이 얼굴의 형태와 기색을 살펴서 환자의 건강상태를 진단할 때 활용하기도 한다. 오장육부의 상태가 일정 부분 얼굴에 드러난다고 하는 이론인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왜 엉덩이에 드러나지 않고 얼굴에 드러나는 것일까? 이렇게 관상이 적중하는 이유에 대한 내 나름의 가설은 얼굴은 바로 얼이 깃드는 굴이기에 인간의 얼굴과 운명, 건강 사이에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뭔가 신비로운 작용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얼굴은 인체에서 대표성을 가지는 부위다. "얼굴에 다 쓰여 있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낭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성형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인해 돈만 있으면 사람 얼굴에 기적이 일어나 지인들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얼굴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시대라고나 할까?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과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관행이 결합된 아주 잘못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 사람을 식별하고 누군가를 기억한다. 나의 뇌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 중에서 특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가 여성의 얼굴이다.
첫 번째 그녀의 얼굴은 사실 눈, 코, 입 같은 구체적인 모습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참 하얬다는 것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교문 밖에서 난리가 났다. 어떤 술 취한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면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는데, 싸우다가 그랬는지 어디에 부딪혔는지는 모르겠으나 머리에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학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어떤 하얀 얼굴의 여학생이 겁도 없이 아저씨에게 달려가서는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더니 가방에서 아주 깨끗하고 하얀 천을 꺼내서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아 드렸다. 나는 그녀의 겁없는 행동에 심히 놀랐다. 난동을 부리던 아저씨도 웬 여학생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니까 물리치지도 않고 고분고분해졌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그 여학생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이제는 그 여학생의 얼굴도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그 하얀 얼굴과 하얀 천만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두 번째 그녀의 얼굴은 내 첫사랑이다. 대학 다닐 때 누구나 최소한 한두 번은 경험하게 되는 미팅이나 소개팅도 나는 해본 적이 없었다. 여자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나는 매우 철학적인 기질이 강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는 일에 천착하고 있었기에 미팅이나 소개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하여간 26세에 처음으로 연애를 하게 된 나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일 수밖에 없었지만, 대학 졸업 후 아직 제대로 취직도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실질적으로 잘해주지 못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지만, 나로서는 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까지 겹쳐서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그녀는 지금 결혼해서 아옹다옹 잘살고 있다고 하니 이제는 기억에서 놓아줘야겠지만, 아직도 가끔은 팔공산과 눈 덮힌 가야산에 함께 올랐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이렇게 여인들의 얼굴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다 보니 나는 40세가 지나도록 아직 미혼이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이 있는데,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가 되면 자기만의 뚜렷한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수립해서 누가 봐도 한 사람의 어엿한 인격자로서 바로 서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근데 문제는 주변에서는 내 얼굴을 보고 30대 동안이라고 말한다. 처자식을 부양하느라 얼굴이 팍삭 삭아버린 여느 동년배들과는 달리 혼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천하의 운 좋은 남자라나 뭐라나.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얼굴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굴도 있겠지만, 사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랑을 많이 나누어서 언젠가 이 생을 마감하는 날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그리운 얼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이 드나드는 굴인 얼굴을 잘 관리해야겠는데, 마음을 잘 다스려서 바른 얼을 함양하는 것이 그 핵심 비결일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과 얼굴의 상관관계에 관해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
* 십여 년 전에 쓴 작품인데 좀 더 가다듬어서 오늘 처음 발표한다.
우원규 시인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명상을 하며 시 쓰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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