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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투명을 동경하며 / 우원규

투명을 동경하며 / 우원규
 
가을엔 가급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게 좋다.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쪽빛 연못에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늘만 자꾸 쳐다보게 된다. 이름 하여 "가을 하늘 중독 증후군"이다. 투명한 가을 햇살은 아주 맑아서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닿는다. 투명한 바람은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모두 깨끗이 날려보낸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우주의 머나먼 어느 행성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마음이 그대로 다 들여다 보인다고 한다. 그런 투명한 마음을 갖고 싶다. 누가 들여다보아도 숨길 게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른 마음을 소유하고 싶다.

모든 위선과 가식을 훨훨 벗어버린 적나라할 정도의 솔직한 상태를 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공자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일컬어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유리같이 투명한 정신과 영혼을 동경한다. 그런데 육체에 대해서도 투명함을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육체의 욕망이 과도해지면 정신의 투명함은 달이 구름에 가리듯 어느새 퇴색해버리기 때문이다.
 
20대부터 새벽마다 실천해 온 명상에 들면, 시간이 멈춘 듯 온 우주가 곤한 잠에 빠진 명징한 고요 안에서 내 속의 회색빛 먼지들은 하나씩 차분히 아래로 가라앉고 서서히 투명한 내 마음이 드러난다. 마치 보름달이 구름을 벗어나듯 환하게 원융하게 은은한 빛을 발한다. 그 순간 내 가슴에 찬란한 투명이 도저하게 자리잡는다.

또, 온 천지가 아주 차갑게 얼어붙고, 영하의 고요가 장악하는 동짓날 밤에는 처마 밑 고드름처럼 투명해진 내 정신이 끝도 없이 광대한 우주를 머릿속 사념의 거울에 비춰보다가 내가 그 순간 숨 쉬고 있는 의미를 멀리서 겸연쩍게 떨고 있는 별들에게 귓속말로 살짝 물어본다.
 
굳이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김영동 국악 작곡가의 경쾌한 국악 연주가 돋보이는 명상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투명해진다. 그의 대표곡인 <산행>이나 <귀소>는 듣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시나브로 마음이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바삭거리는 붉은 단풍잎 하나 입에 물고서 해거름 노을빛에 물든 다람쥐와 함께 발걸음도 가볍게 산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또, 영국 전통 민요인 그린슬리브즈의 애잔한 피아노 선율이 내 가슴에 스미면 나는 조악한 육체 따위는 시원스레 벗어던진 채 오롯이 투명한 정신만으로 남아서 피아니스트의 예술혼과 하나가 되어 손을 잡고 천국에서 춤을 춘다. 가을 햇살을 밟는 듯한 경쾌한 건반의 움직임이 피아니스트와 듣는 이를 모두 천국으로 이끈다. 일상생활 중에서도 좋은 음악을 잘 가려서 듣는다면 정신과 영혼을 순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나의 10대와 20대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20대 중반부터 명상을 통해 마음의 투명함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교 시절부터 내 마음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볼 때 내 주변 환경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내 내면에서는 이미 불행이라는 단어의 뜻을 음미하고 있었다. 마치 늪에라도 빠진 듯 벗어나려고 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성적이 우수했던 것 외에는 지금 돌아봐도 가슴이 너무 답답해지는 고교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유독 예민했던 나의 핑계일수도 있겠지만 학력수준이 각기 다른 60명 가까운 학생들을 한 교실에 앉혀 놓고 가르치는 당시 학교의 열악한 교육환경도 내 우울증 초기 증상의 진전에 한몫했다. 벗어나고 싶어도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히말라야 요가수행자들의 신비한 삶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세계로 도피하곤 했다. 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으면서 고단한 고교 시절을 힘겹게 버텨냈다.

나중에 내가 알게 된 것은 내 머리 위에는 남들보다 몇 배나 큰 바위가 올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키가 좀 작은 이유가 바로 그 커다란 바위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사람마다 누구나 머리 위에 돌이 하나씩 얹혀 있는데, 어떤 사람의 돌은 조약돌처럼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고 본인도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 자그마한 게 오히려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나보다 더 큰 바위를 머리에 얹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을 볼 때는 되려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다는 건 어찌 보면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다. 삶의 고비 고비마다 무수한 경계에 부딪히더라도 육체가 타고난 오욕칠정(五慾七情)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초연하게 살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 것과 상관없이 명경(明鏡) 같은 정신의 투명함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으리라. 투명이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보름달처럼 마음이 환해진다. 투명해진다는 건 은빛 달무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_ 한국문학신문, 월간 국보문학 동인문집 『내 마음의 숲』제 39호에 발표


우원규 시인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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