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방 / 우원규
내가 글을 쓰고 명상도 하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방을 소개하려니 약간 겸연쩍지만 내 방에 들어오면 누구나 사방으로 볼거리가 많아서 눈이 휘둥거레지기에 내 방 풍경을 간략하게 묘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먼저 내 책상 가장자리에는 등산하면서 내가 발견한 손바닥보다 더 큰 크기의 석영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다. 석영 표면에는 백수정 결정이 형성돼 있어서 자연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결정이 형성될 수 있는지 신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책상 중앙에는 보라색 수정 원석을 깎아서 만든 야구공보다 조금 더 큰 수정구가 반질반질한 광택을 뽐내고 있다.
의자에 앉으면 맞은편 벽에 오로라 사진을 인쇄한 에코백 두 개가 걸려 있다. 왼쪽 에코백에는 붉은색과 녹색 오로라가 어울어져 피어있는 하늘에 북두칠성과 아르크투루스가 밝게 빛나고 있다. 별 하나하나에 수정 조각을 붙여서 말 그대로 하늘에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도록 내가 장식했다. 다른 에코백에는 은하수와 오로라가 서로 교차하며 하늘을 수놓고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주문 제작한 이 두 개의 오로라 사진 에코백은 우주에 대한 내 관심과 애정의 징표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플루트 연주자가 플루트를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포스터가 걸려 있고, 책상 오른쪽 벽에는 가슴에 바이올린을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 연주자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가 걸려 있다. 둘 다 연주회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인데 연주회가 끝난 후 내가 떼 와서 방에 걸어둔 것이다. 나는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우리 국악기로는 해금과 대금 연주를 자주 듣는다. 트로트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던 때에도 나는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플루트로 연주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와 "시네마 천국" 해금 연주를 들으며 산책하는 걸 즐겼다.
특이하게도 나는 대중가요를 좋아했던 내 또래들과는 달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을 통해 국악을 많이 접했다. 안개 자욱한 산 중턱의 정자에 앉아 대금을 부는, 갓을 쓰고 옥색 도포의 널따란 소매를 길게 늘어뜨린 선비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혹시 내 전생의 기억에서 비롯된 기시감(旣視感)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포스터 옆에는 내 시로 만든 시화(詩畵)가 걸려 있다. "유혹_글라디올러스"라는 시인데 고귀하고 순결한 꽃, 글라디올러스에 대한 나의 각별한 애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심지어 이 시에 내가 직접 곡을 붙여 시노래를 만들어서 SNS에 공유하기도 했을 정도다. 내 인스타그램에 오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사실 내 방에는 말린 꽃다발이 세 개나 놓여 있다. 그런데 꽃에 대한 나의 과도한 애정 탓에 급기야 수목원에서 모르는 여자로부터 "꽃 좋아하게 생긴 남자"라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여자와 함께 온 남자가 스마트폰으로 노란 수선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남자가 웬 꽃?" 하니, 여자가 내가 들으라는 건지 듣지 말라는 건지 구분하기 애매한 크기의 목소리로 내뱉은 "꽃 좋아하게 생겼구만!"이라는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이 향긋한 봄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사이에 둘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 당시의 아리송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은 옷장 옆면에 길게 걸려 있는 내 설치미술 작품을 소개한다. 제목은 "별의 궤적"인데 별 무늬가 가득한 푸른색 손수건과 우리 은하의 소용돌이 형상을 닮은 손가락 지문 무늬가 그려진 검정 손수건을 이어붙인 후 책상 달력에서 빼낸 꾸불꾸불한 철사 끝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은색 플라스틱 공을 묶어서 손수건 위로 길게 늘여뜨려서 작품을 완성했다. 우리 은하 중심을 초속 약 200km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는 하얀 별의 궤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우주의 카오스 속을 떠돌고 있는 우주먼지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표현한 내 나름의 설치미술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내 의자 뒤에 놓인 작은 선반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진 네모난 종이상자를 소개하고 싶다. 원래는 판매용 와인을 보관하는 포장용 상자인데 누군가 와인만 마시고 상자는 나지막한 담 위에 보란 듯이 올려둔 것을 내가 저녁에 산책하다가 발견했고 그냥 버리두기가 아깝다는 생각에 들고 와서 내 방에 갖다 놓았다. 와인 두 병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상자로 고흐의 명작이 그려져 있으니 가끔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오래 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고흐 전시회에 갔었던 당시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소개해본 내 방의 풍경이다. 이만하면 시인의 방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하며 이 방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울릴 작품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바라본다. 나는 이 방에서 글을 쓰며 그로테스크한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비루하지 않은 푸른 별을 꿈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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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규 시인
본명: 우용수
경북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만다라문학 시 신인상(2009)
만다라문학 단편소설 신인상(2010)
한국문학신문 단편소설 작품상(2011)
시집 《위로》(2012)
선수필 신인상(2013)
시집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2025)
시노래 시와 작곡 5건, 노래 작사 2건
티스토리 "우원규 시인의 서재" 운영
명상하며 시 쓰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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